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폴란드-리투아니아 관계 (문단 편집) === 근세 === 1440년부로 [[야기에우워 왕조]]의 [[카지미에시 4세]] 제위 시기를 기점으로 폴란드의 국왕은 동시에 리투아니아의 대공으로 동시에 양국을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다만 당시에는 폴란드 의회와 리투아니아 의회가 서로 분리되어 있었으며, 야기에우워 왕조 국왕들은 리투아니아에서는 세습 대공[* 야기에우워 왕조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통치 가문이었던 게디미나스 가문의 직계임을 감안하면 리투아니아 세습은 당연했다.]이었으나 폴란드에서는 엄연히 선출 국왕이었다. 이후 [[루스 차르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 사이의 갈등 및 계속된 크림 타타르의 침략으로 리투아니아 귀족들 상당수가 위기의식을 느끼고, 이를 계기삼아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는 1569년 7월 1일부로 [[루블린 조약]]을 통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양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통일하였다. 통일 과정에서 적지않은 리투아니아 대공국 귀족들이 반발하였으나 폴란드 왕국 군대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알짜 영토인 우크라이나 [[초르노젬]] 지대를 병합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이미 루스 차르국의 군사적 압력에 위협을 받던 리투아니아 대귀족들은 폴란드에서 강경하게 나오자 연방 통일을 순순히 승인할 수 밖에 없었다. 폴란드인 귀족과 리투아니아인 귀족들은 동등한 대우를 받았으며, 연방 법은 리투아니아 대공국 법[* 당시 대공국 법은 루테니아인과 리투아니아인들 상호간의 갈등을 예방하고 이익을 조율하기 위해 짜여진 법으로 폴란드 왕국 법보다 더 세밀하고 상세한 편이었다.]을 기반으로 다시 짜여졌다. 이후 리투아니아인 귀족들과 폴란드인 귀족들 사이의 통혼이 일상화되고 루테니아인, 리투아니아인 귀족 상당수가 폴란드인 귀족들과 완전히 동화되는 과정이 이루어졌다. 연방의 영토는 [[우크라이나]] 중부에서 [[라트비아]]까지 이어졌다. [[루블린 조약]]에 의한 연방제 통일 이후 17~18세기에는 리투아니아어보다 폴란드어가 리투아니아 귀족들 사이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심지어 리투아니아의 수도였던 빌뉴스는 1945년 소련이 지배하기 전까지 인구의 80%가 폴란드인이었고, 1920-39년 사이에는 폴란드가 괴뢰국을 세워 두었다가 아예 자기 땅으로 만들었다.] 동유럽에서 폴란드 귀족 문화는 첨단 호화 문화의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리투아니아 동군연합 당시부터 수도 빌뉴스의 상류층들이 이를 모방하기 시작하면서 심지어 상당수 귀족 가문들이 폴란드식 성으로 개명하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으로 1569년까지는 리투아니아 대공국 영내에서 폴란드인이 공직을 맡거나 토지재산을 소유하는 것이 불가능했으나, 이후로는 이런 제약이 풀리면서 폴란드인과 리투아니아인 귀족 사이의 통혼이 크게 증가하였다. 국제 도시로 성장한 빌뉴스와 그 근교에서는 주민들이 수백여년에 걸쳐 폴란드인들과 통혼하며 폴란드어를 사용하다가 폴란드인으로 동화되었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대홍수(역사)|대홍수]] 당시 야누시 라지비우 등등의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연방이 [[흐멜니츠키 봉기]]와 [[루스 차르국]]의 침공으로 흔들리는 사이 [[스웨덴 제국|스웨덴]]과 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을 주장하는 케다이니아이 조약에 서명하였고, 상당수의 리투아니아 대공국 귀족들이 여기에 동참하면서 한 때 연방은 존폐 위기를 맞았다. 당시 케다니이아이 조약에 참여한 리투아니아 대공국 귀족들은 리투아니아가 지나치게 폴란드에 예속되어간다는 점과 연방제 통일 당시 기대했던 바와 다르다는(즉 폴란드가 루스 차르국의 공격으로부터 리투아니아를 잘 보호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케다이니아이 조약 이전 상당수의 리투아니아 대귀족들이 스스로를 폴란드 왕국 귀족들과 차별화하기 위해서 개신교[* [[독일계 폴란드인]]들이 주로 믿던 [[루터교회]] 신도도 있었으나, 좀 더 독자적인 정체성을 추구했던 이들은 [[칼뱅교회]]나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교파 [[유니테리언]]을 믿었다.]를 믿고 보급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케다이니아이 조약을 비준했던 야누시 라지비우가 서명 이후 2달 만에 사망하고, 폴란드 리투아니아 영내에 진입한 [[스웨덴군]]이 약탈을 일삼자 리투아니아인과 폴란드인들의 민심은 스웨덴으로부터 돌아섰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스웨덴의 침입을 격퇴한 이후 국체를 보전하는데 성공하였다.[* 흥미롭게도 근대 폴란드인, 리투아니아인 독립운동가들이 서로 일체감을 가지고 있던 19세기 당시에는 스웨덴 편을 들었던 야누시 라지비우 등등의 귀족들이 매국노로 지탄받았지만, 20세기 이후 현대 리투아니아에서는 야누시 라지비우가 리투아니아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긍정적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18세기 말에 폴란드-리투아니아는 [[폴란드 분할]]을 통해 [[프로이센 왕국]], [[합스부르크 제국]], [[러시아 제국]]에 의해 멸망당했고 폴란드 동북부와 리투아니아는 러시아 제국의, 폴란드 서북부와 소 리투아니아[* 현재의 [[클라이페다]] 일대로 이곳은 오늘날 리투아니아의 다른 지역과 달리 14세기부터 계속 [[독일 기사단국]]-[[프로이센 공국]]-[[프로이센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지역은 프로이센의 지배를 받았다. 폴란드 남부 지역은 오스트리아가 차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